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사이고 다카모리 (문단 편집) === 맞다 === 하지만 위와 같은 발언(나 죽거든 공격하라)을 한 것도 있어서 정한론자가 아니라고 단언할수 없다. 지금 당장 침략하는것을 반대한다고 해서 정한론자가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다. (후에 [[이토 히로부미]]가 증명.) "메이지 정부는 조선침략 의사가 없었기 때문에 사이고를 반대한 것"이라는 투의 일본 측 주장에 반박하자고 적의 적은 동지라는 막연한 감정으로 "사이고는 정한론자가 아니다"라고 보는 것은 더더욱 아귀가 맞지 않다. 게다가 당시에 서구 열강에서도 비슷한 주장이 있었으며,[* 도굴꾼 오페르트조차 처음에는 단순히 통상을 요구했을 뿐이었다.] 유교 질서 유지를 중시한 [[흥선대원군]]의 반감을 샀기 때문에 결국 [[오페르트 도굴사건]]이라든가 [[제너럴 셔먼호 사건]], [[병인양요]], [[신미양요]] 등이 일어나는 지경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자칭 "황제국"의 신하가 "근대 외교를 하자"고 찾아오는데 수용할 도리가 있겠는가. 그를 친한파라거나 평화주의자로 볼 여지는 없다.[* 이 주장이 국내 사학계에서 주류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 함의에 대해서 좀 더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일단 결과적으로 봤을 때 일본은 끝내 조선을 병합해버렸다는 걸 잊어서는 안 된다. 이런 상황에서 "사이고 다카모리는 정한론을 강행하려다 메이지 정부의 반발을 샀다"는 기존의 주장을 고수할 경우, 이는 "20세기 초 일본이 조선을 병합한 건 정한론의 목적이 아니라 __조선을 근대화시키려는 선의의 목적__이 깔려있었다"는 식의, 전형적인 [[대동아공영권|흥아론]] 논리를 그대로 수용하는 거나 다름없다. 안병직도 이런 소린 안한다.][* 결정적으로, 고작 40년 전까지만 해도 국내 동양학계는 일본의 연구성과를 유의미한 변형 없이 그대로 답습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리고 사이고 다카모리 본인이 무력 침략에 찬성했는지 아닌지는 별개로, 일본 중학교 역사 수업에서도 사이고를 정한론자로 가르친다. 그 이유는 메이지 6년([[1873년]])에 일어난 정한론 논쟁에서 시작된 정쟁에서 지고 신정부의 공무원직을 버리고 낙향한 약 600여 명의 정한론자들이 무력으로 조선을 치자는 주의였다. 사이고는 그 대표였다.[* 여기에는 여러 해석이 있는데, 군인이라는 신분을 잃게되는 사무라이 계급에게 같은 사무라이 출신이자 군인이었던, 그리고 정에 약한 사이고가 동정했다는 설도 있고, 당시 출범한 지 얼마 안된 메이지 정부는 심각한 재정적 시련을 겪고 있었는데, 내치를 우선해서 부국강병을 하자는 반대파 오쿠보의 주장에 대해, 가장 쉽게 부국강병하는 방법은 영국, 미국, 서양 열강이 했던 것처럼 남의 땅 쳐들어가서 굴복시키고 빨대 꼽고 꿀 빨아들이는 것이 확실하고 빠른 방법이라는 [[제국주의]] 논리(정한론파의 주장)를 편들었다고도 하지만 그 진위는 불분명하다.] 메이지 정부가 들어서고, [[보신 전쟁]]으로 내란이 끝나고 일본이 통일되고, 근대국가처럼 [[국민개병제]]로 일반 평민을 징병해서 [[상비군]]을 갖추면, [[토사구팽|가장 쓸모가 없어지는]] 계급이 지금까지 군인 신분으로 특권을 누렸던 [[사무라이]] 계급이었다. 정한론의 지지자들은 이런 사무라이 계급(士族)의 젊은이들이었다. 이들 사족들의 몰락은 메이지 유신 과정에서 예정되어 있었고, 전쟁이 일어나면 힘을 가지는 것은 무사 계급이었기 때문에 이들은 [[임진왜란]] 때처럼 조선을 무력으로 침략해서라도 자신들의 계급을 유지하기를 바랐다. 이런 시도가 정한론 논쟁에서 패하고 낙향한 후로, 메이지 신정부가 사족 계급을 박대하자 사족들이 들고 일어난 것이 [[사가의 난]][* 사가의 난의 주도 세력인 정한당(征韓黨)은 조선을 쳐들어가면 자신들이 선봉대가 될 것이라고 모여든 놈들이었다,]을 시작으로 하는 사족들의 반란과 세이난 전쟁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조선과 전쟁을 할 돈이 없다는 이유로 정한론을 반대했는데, 내전으로 지들끼리 싸워서 더 큰 피해와 경제적 손실을 입었다. 또, 높으신 분들을 보내자는 것과 조선에 대한 존중 여부를 결부짓는 견해가 있는데, 사실 일본은 결과적으로 보면 저 조언을 따르긴 따랐다. 예를 들어서 당장 [[강화도 조약]]의 일본측 당사자인 [[구로다 기요타카]]는 대략 20년 뒤 일본의 내각 2대 총리대신은 물론이고 원로가 될 정도의 거물급 인사인 점도 그렇고, 설사 이것이 20년 뒤의 일이니 타당성에 의문을 제기한다 치더라도, 대표적으로 [[이노우에 가오루]]는 이토와 동급으로 대접받는 조슈 3존 중 하나다. 이노우에 이전 사람인 오토리 게이스케도 그 급은 아니라도 나름 중량급 인사였고. 마지막으로, 조선을 독립시키되 일본의 동맹으로 두자는 입장 역시 러일전쟁으로 일본이 남만주까지 손을 뻗치기 이전에는 [[일본 정부]]의 공식적인 주장이었다. 이는 물론 조선 측을 안심시키고 명분을 얻는 목적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일본도 청일전쟁, 러일전쟁 이전까지 자기들이 조선을 먹을 수 있다는 가능성 자체를 회의적으로 본 점 역시 있다. 일단, 내막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배경 지식이 필요하므로 일단 당시 상황을 어느 정도 알아보자. 내용이 제법 길기 때문에 이 부분은 건너 뛰고 다음 문단부터 읽어도 상관은 없다. 우선, 1868년 막부가 소멸하고 천황을 중심으로 한 메이지 신정부가 수립되어 조선에 왕정복고를 알리고 새로운 국교관계 수립에 대한 사절을 파견하였다. 그러나 조선이 일본 측에서 받은 '서계'에 천황과 관련된 '황皇', '칙勅' 등과 같은 문자가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자 기존과 형식이 틀리다는 이유로 거부하고 수차례 변경을 요구했다.[* 조선이 이를 받아들이는 것은 기존의 대등 관계 혹은 조선 우위 관계가 역으로 일본 우위의 상하 관계로 변경된다는 사실을 의미했다.] 그러나 일본은 '조선 국왕이 에도 바쿠후의 역대 쇼군과 대등 관계에 있었고, 바쿠후의 쇼군은 천황의 신하이기 때문에 조선 국왕은 일본 천황에게 신하의 예를 갖춰야 한다'며 조선의 요청을 거절하였다. 메이지 신정부는 1869년 외무성 관원 사다 하쿠보 등을 조선에 파견에 외교 교섭을 계속 진행했다. 결국 모든 국교 교섭에 실패하자 1870년 3월에 돌아온 사다 하쿠보는 '''일본의 입장대로 조선과 국교를 수립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조선을 정벌해야 한다는 [[정한론]]'''을 정부에 건의하게 된다. 이처럼 일본과 조선간의 외교 갈등은 점차 고조되어갔고, 일본에서는 정계나 민간할 것 없이 정한론이 득세하게 되었다. 그런데 1873년 4월 [[쓰시마]] 상인이 아닌 자가 [[왜관]]에서 적발되어 금지령이 반포되는 사건을 계기로 일본측이 폭발했다. 원래 [[기유약조]]에 따르면, 이건 일본 쪽에서 조약을 위반한 것이고, 조선'''정부'''가 일본'''정부'''에 공식적으로 입장을 표명한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문제는 [[동래부]]가 별 생각없이 '''"이런 일이 일어난 건 일본이 무법지국(無法之國)이 되어서임"'''이라는 문구를 집어넣은 탓이었다. 문제는 [[쿠로후네 사건|외국에게 강제 개국 당하고]], 지지고 볶다가 에도 막부가 멸망할 정도로 나라 사정이 영 불안스러웠던 일본 입장에선 단순하게 받아들일 수 없는 말이었다는 것이다. 이 문구가 실려 있었다는 문서를 일본 쪽에선 '''동래부 전령서'''라고 부르며 1873년의 정한론 소동의 주요 원인으로 보고 있지만, 한국 쪽은 일본의 트집 중 하나 정도로 여기며 이 문서가 실존하는지조차 별 관심이 없다.[* 다소 지엽적이긴 한데, 좀더 얘기해보자면 이 동래부전령서라는 게 일본 쪽에서 극대노해서 전쟁까지 들먹일 정도로 무례한 표현임은 분명하다. 그런데 문제는, '''이게 정말 공식 문서같지가 않다는 것'''이다. 실제로 조선 쪽 기록에는 이 전령서라는 게 전혀 남아 있지 않다. 아무리 동래부사가 인근 지방관 중에서는 품계가 높고, 당대 지방관들이 권한이 막강했다고는 해도 지방관들에게 외교권은 없었다. 게다가 표현도 너무 거칠고 경박해서 이게 외국인들에 대한 공문서인지, 자기집 종한테 적어준 쪽지인지 구분도 안 되는 수준이다. 잘 봐줘도 동네 향반이나 아전 애들이 사또 이름 사칭해서 벽에다 붙인 찌라시 갖고서 일본이 호들갑 떨었던 거라는 의심을 지울 수 없다. 무엇보다 이게 정식 포고문이라고 하더라도 조선 '''정부'''가 일본 '''정부'''에 공식적으로 보낸 것도 아니라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어쨌거나, 이게 원인이 되어서 일본 조정에 비상이 걸렸는데 21세기 이후 연구 대중들도 1차 사료를 손쉽게 접할 수 있게 되면서, 단순히 교과서에 실린 내용이 아니라 사이고가 주장한 내용 거의 그대로 접근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런데 이 1차 사료들만 봐도 사이고가 어떤 입장이었는지, 지나가던 유치원생도 해석 가능할 정도로 이해가 쉽다는 점이다. 일단은 사이고가 조선 정벌문제가 최초로 논의될 때 각료 회의에서 주장한 내용이다. 출처는 일본 쪽 공식 기록인 메이지 천황기다. 한국사로 치면, 정조 실록 비슷한 것이다. > 지금 갑자기 육해군을 파견한다면 조선 인민은 일본이 조선을 병탄하는 것이 아닌가 의구심을 품게 될 것이다. 이것은 우리 조정의 의사에 반하는 일이다. 우선 전권사절을 파견해서 일본의 참뜻을 전하고 조선 측을 설득해야 할 것이다. 조선이 이를 듣지 않고 계속해서 무례하게 군다면, (그때) 그 죄를 천하에 알려 조선을 치면 된다. 전권사절로는 내가 가겠다. 여기까지만 보면 그럴 듯하다. '''실제로 사이고 반정한론자를 주장하는 세력들도 딱 여기까지만 얘기한다.''' 이때 메이지 신정부에서는 이와쿠라 도모미를 위시한 내치파와 사이고 다카모리를 위시한 정한파가 싸우고 있었다. 일단 [[이와쿠라 사절단|이와쿠라가 서양에 나가 있던 탓]]에 사이고의 요구가 회의에서 통과되지 못하고 잔류하게 된다. 사소한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이와쿠라 쪽 사람들이 이와쿠라가 귀국할 때까지 결정을 미루자며 시간을 끌면서 사이고는 이들에게 발이 묶이는 신세가 되었던 것. 그리고 조급해진 사이고가 서한문을 보내거나 직접 방문하거나 하면서 '''자기 속내를 다 털어놔 버린다.''' <메이지 천황기>[* 일본 궁내성에서 편찬한 메이지 천황의 전기이며, 메이지 천황과 메이지 시대의 역사를 연구하기 위한 기본 자료로 활용되고있다.]에 따르면, 마음이 급해진 사이고가 태정대신인 [[산조 사네토미]]를 찾아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 이와쿠라의 귀국을 기다리다가는 시기를 놓치게 된다. 사절이 간다면 조선에서는 반드시 사절을 죽일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때야말로 그 죄를 물어 군대를 파견할 명목이 선다. 지금의 국내 정세에는 내란 발생을 바라는 조짐이 팽배해 있다. 이럴 때 그 분노의 화살을 밖으로 돌려서 국위를 해외에 떨치자. 즉, 즉각 정벌을 반대하고 선외교사절을 주장한 게 맞긴 맞다. 그런데, 그런 주장을 한 까닭은 '''내가 외교사절로 가서 국교 수립해도 이득이고, 수립 못해도 십중팔구 조선인들이 날 죽일텐데, 그러면 [[명분|전쟁각]]이 서지 않겠냐? 그때 조선을 치면 된다'''였던 것이다. 사실 일본 쪽에서 그동안 '사이고 = 정한론, 외워라 외워!' 수준으로만 교육하고도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은 이와 같이 내막을 자세히 들여다 보아도 기존의 통설이었던 '''사이고가 정한론자임이 너무 명백했기 때문'''이다. 사실 그냥 쳐들어가는 것이나 본인이 죽어줘서 핑계거리를 만든 뒤 쳐들어가는 것이나 대체 당하는 입장에서 뭔 차이가 있겠는가? 일본 쪽에서 위와 같은 사정을 자세히 밝히기보다 ''''그냥 사이고가 정한론자였는데, 마침 지가 반란을 일으켜서 실행에 옮기기도 전에 죽어버렸네요?'''' 정도로 떼우고 넘어왔었던 것. 사실 일본 정부나 민간이나 정한론이 지독하게 구린 얘기라는 건 다들 인정하는 바인데, 당대 일본 지배 계급 중에 조선 정벌 자체를 반대하는 인물은 극소수에 불과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마침 적당할 때 조선정벌 소동을 벌이다 실각한 데다가, 심지어 신정부 입장에서는 반란이었던 서남전쟁을 일으킨 뒤 죽은 사이고 다카모리가 있으니, 그에게 정한론의 모든 책임을 떠넘겨 버리는 게 가능한 얘기 아닌가? 즉, 나라를 위해 죽겠다던 사이고가 결과적으론 오명을 혼자 뒤집어쓰고 죽어 버린 셈이 되었다. 그런데 이런 애매한 상황을 틈타서 근래[* 대놓고 말하면 일본애들이 위키피디아를 작성하기 시작한 시점부터. 사이고 평화론자 주장이 최초로 나온게 20세기 후반이긴 한데, 뻔히 증거가 있는 상황에서 이걸 인정한 학자의 수는 많지 않다.] 들어 사이고 추종자들이 지들 입맛에 맞는 지엽적인 부분[* 예를 들면 위의 사이고 발언 중 "갑자기 육해군을 파견하면 안된다"라는 것이나, 궁중의상을 입고 가야 된다는 등의 중요하지 않은 부분.]만 골라내서 '''사이고는 정한론자가 아니라 외교론자였다'''는 해괴한 주장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왜 이들이 사이고 반정한론자 주장을 들고 나왔냐면... '''이런 인간들조차 정한론이 나쁜 얘기라는 건 인정할 수밖에 없어서다.''' 그런데 이거, 위에서 논했듯이 1차 사료들, 심지어 사이고 본인이 작성한 증거들이 빼도박도 못하게 잔뜩 남아있다. 무엇보다도 핵심이 되는 것은 사이고가 [[이타가키 다이스케]][* 이 사람은 외교고 나발이고 일단 쳐들어가자는 쪽이었다. 한마디로 사후 왜곡도 불가능할 정도의 정한론자.]에게 빚 독촉이라도 사람마냥 편지 다섯 통을 보냈다. 어쨌거나, 사이고의 계획을 저지한 것은 이와쿠라였다. 위에서 언급한대로 이와쿠라가 자리를 비운 탓에 이 문제에 대한 결정이 늦춰졌는데, 남아있던 정한파 정부 인원들이 멋대로 사이고 다카모리를 조선에 사절로 파견하기로 결정해버린다. 그리고 이와쿠라가 귀국한 뒤에는 이 문제가 이와쿠라 vs 사이고의 문제가 되어 버려, 그야말로 조정이 양분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결국 내치파가 정쟁에서 승리해 사이고의 조선 파견을 저지하고 메이지 천황이 '''조선과의 전쟁을 불허한다.'''는 결정을 내리면서, [[메이지 6년 정변|사이고 일파는 전원 참의(參議)직을 내놓고 사표를 제출했다.]] 그리고, 사이고가 귀향한 후 그동안 쌓여왔던 사무라이 계층의 불만이 슬금슬금 폭발하면서 이와쿠라 암살시도라던가, 사이고 암살설의 소문이 돈다던가 하는 식으로 정국이 불안해진 끝에 세이난 전쟁이 발발하게 되었다. 참고로, 서남전쟁에서 사이고 세력은 개전 이유 중의 하나로 정한을 들었다. 뿐만 아니라 전쟁 이전에 [[사가의 난|사가현에서 일어난 정한당의 봉기]][* 대놓고 '조선 정벌 안해서 우리 반란 일으킴'이라고 표명했다.]에서도 사이고를 지도자로 모시려는 시도가 있었다.[* 지도자였던 에토 신페이가 도주 중에 사이고와 접촉한 기록이 남아있다.] 사정이 이러니 아무리 뭘 어떻게 왜곡해봤자 사이고는 그냥 정한론자가 맞다. 한편, 사이고의 정한론에 반대한 사람들이 평화를 사랑해서라든가 양심의 가책을 느껴서 였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당시에 조선 정벌을 포기한 까닭은, 사실상 당시 일본의 국력 수준으로 조선과 전쟁을 벌일 능력이 안 되었다는 점, 그리고 조선 문제 말고도 다른 중요한 문제거리들이 있었다는 점 때문이었다. 따지고 보면 조선 침공(정한론)에 반대했던 파도 일단 국내 부국강병이 우선이라는 명분을 내세우기는 했지만, 그 내막을 보면 이와쿠라 도모미가 이끄는 이와쿠라 사절단이 해외에 나가서 시찰하고 있는 동안에는 국가의 중요정책은 결정하는 것을 보류하기로 약조를 맺었는데, 사이고 일파가 이것을 무시하고 여러 행정적 중요사항을 지들 맘대로 결정했고, 오쿠보 도시미치가 이에 분노한 것이다.[* 다만 사이고가 중요사항을 맘대로 결정한건 나름의 이유가 있다. 사이고는 당초에는 약속을 지키고자 했으나 이와쿠라 사절단이 돌아오겠다고 약속한 기일을 너무 넘겨버린 것. 이에 정부의 몇몇 인물들은 언제까지고 이와쿠라를 기다리고만 있을 순 없다고 주장했고 결국 사이고도 동조한 것이다. 참고로 이와쿠라 사절단이 약속을 넘겨서 유럽에 계속 체류했던건 외교적 목적도 있지만 관광도 함께 즐기기 위해서였다.] 정한론 논쟁이 방아쇠가 되어 메이지 정부의 관료들간의 파벌 싸움으로 번진 셈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